신용회복경험담
외국계 회사 직장인의 개인회생 이야기
- 최고관리자 16일 전 2025.05.30 12:23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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도입부: 안정된 삶, 그 뒤의 불안
저는 올해 35세, 외국계 IT 기업에서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. 대기업만큼 바쁜 일정과 치열한 업무 속에서도, 내 가족을 위한 삶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달려왔습니다.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의 웃음을 볼 때면 하루의 피로가 씻겨 내려갔죠.
경제적으로도 남부럽지 않았습니다. 연봉은 6천만 원대였고, 성과급이나 주식 보너스도 주기적으로 들어왔습니다.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달리, 제 안의 균형은 무너지고 있었죠.
전개: 이혼과 함께 무너진 재정
3년 반 전,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됐습니다.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갈등의 시간이었고, 결국 재산 분할과 위자료로 총 7,800만 원이라는 금액을 떠안게 됐습니다. 은행 대출 두 곳, 카드사 한 곳에서 자금을 마련했지만, 그때부터 제 삶은 빚의 무게에 눌리기 시작했습니다.
초기에는 월급과 보너스로 일정 부분을 갚아 나갔지만, 문제는 생활비였습니다. 아이 양육비와 제 혼자 사는 생활비, 회사 업무상 접대나 출장 경비까지 감당하다 보니, 카드 대금은 늘어나고 돌려막기를 시작하게 됐습니다.
마케팅은 성과에 따라 변동이 큰 부서라, 실적이 좋지 않은 해엔 보너스가 없었고, 그 해가 제겐 치명타였습니다. 급하게 받은 카드론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, 심지어는 한 달 월급의 80%가 고정 상환으로 나가버리기도 했습니다.
위기: 딸아이의 한마디
결정적인 계기는 딸아이와의 전화 통화였습니다. “아빠는 왜 맨날 힘들어 보여?”라는 순수한 한마디가 마음을 찢었습니다. 그동안 아이 앞에서는 괜찮은 척 했는데, 그게 다 들켰구나 싶더군요.
한동안 고민만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. ‘내가 개인회생을 해야 할 만큼 망가진 걸까?’, ‘그건 나 같은 사람이 하는 거 아냐?’라는 자존심이 컸습니다. 하지만 주변에 조심스레 털어놓자, 의외로 현실적인 조언들이 돌아왔습니다. “이미 많이 버텼다. 더 망가지기 전에 정리하는 게 가족에게도 좋다”는 말이 가슴에 남았죠.
마지막으로 개인회생 상담을 예약하고, 퇴근 후 조용한 사무실에서 전화 상담을 받았습니다. 그때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.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저와 같은 상황에 있었고, 제도가 생각보다 체계적이었습니다.
해결: 회생의 시작은 정리에서부터
상담 후 실제 서류를 준비하고 법원에 접수하는 데까지 약 두 달, 인가까지는 총 5개월 정도 걸렸습니다. 제 수입과 지출 내역, 부채 증빙자료, 양육비 지출까지 꼼꼼히 정리했고, 법원에서도 성실 상환 의지를 높게 평가해줬습니다.
최종 인가된 변제계획은 월 60만 원씩 3년간 갚는 것이었습니다. 총 변제액은 약 2,160만 원. 나머지 채무는 면책 대상이 되었고, 저는 드디어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.
법원 출석 당시, 내 삶을 다시 설명해야 한다는 게 참 쑥스러웠습니다. 하지만 판사님께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. “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로 되돌리고 싶다”고요. 인가 결정이 났을 때는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. 꼭 돈 때문이 아니라, 스스로를 인정받은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.
결말: 조금씩 회복되는 삶
이제 개인회생 변제 1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. 매달 60만 원씩 꼬박꼬박 납입하고 있고, 불안했던 신용 상황도 점차 회복되고 있습니다. 무엇보다 제 생활이 단순해졌습니다. 소비를 줄이고, 꼭 필요한 것만 쓰다 보니 ‘내가 진짜 필요한 건 무엇인가’를 되돌아보게 됐죠.
아이와 보내는 시간도 달라졌습니다. 예전처럼 무거운 얼굴이 아닌, 더 따뜻한 아빠가 되고 싶어 노력하고 있습니다. 일도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, 다음 승진 기회를 위해 자격증도 준비 중입니다.
이 글을 읽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. 개인회생은 ‘망했다’는 표시가 아니라, ‘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’는 선언입니다.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, 상담부터라도 받아보세요. 저는 그 한 통의 전화로 삶이 달라졌습니다.